8.09.2026 전도서 12:1-8 하나님을 기억하라
8.9.2026. 전도서 12:1-8 하나님을 기억하라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 마지막을 맞이하는 모습은 각기 다릅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더 살았으면…” 하며 아쉬워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내 인생을 잘못 살았다”라고 후회하며 두려워 떨면서 절망속에 치를 떨면서 허무하게 마지막 순간을 맞이합니다.
죠지 버나드 쇼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라는 말을 남기며
절망하며 마지막 순간을 맞이 했습니다.
그러나 평생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감사하며
곧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에 가슴이 부풀면서 눈을 감습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딤후 4:7-8)라는 고백을 하며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하는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은
이 지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누구나 늙는 것과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두려움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감사함으로 벅찬 소망으로 맞이할 수 있는 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는 것입니다.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
영원한 저 세계로 가기전에
우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절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너는 청년의 때에.”
여기서 청년이란 몸의 기능이 아주 건강한
10대~40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을 때’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이 이르기전에
곤고한 날이 이르기전에
**그러면 곤고한 날은 어떤 날입니까?
청년의 때가 지나고 곧 곤고한 날이 이를때의
우리 사람의 모습을
2절부터 7절까지 구체적으로 매우 생생하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늙어가는 것과 죽음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한 채의 오래된 집이 허물어지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 근동의 지혜문학에서 흔히 사용되던 알레고리 기법입니다.
함께 한 구절씩 짚어보겠습니다.
2절을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빛을 잃고 어두워지기전에…
우리 인생의 삶의 기쁨, 소망, 지혜, 그리고 명확했던 정신이나 시력 등 인생의 총명함과 활력이 감퇴하고 어두워진다는 겁니다.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비가 오고 난 뒤 날이 개는 것이 아니라,
다시 먹구름이 몰려오는….
계속해서 먹구름이 몰려오는 곤고한 날이라는 겁니다.
젊었을 때는 시련이 지나면 그것을 빠르게 회복하며 다시 개인날을 맞이하게 되는데…
노년에는 한 가지 어려움이나 질병이 지나가도
또 다른 문제가… 고통이 연이어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3절: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떠는 것은….
몸을 보호하던 ‘손과 팔’이 떠는 것입니다..
힘있는 자들이 몸을 받치던 ‘다리와 허리’가 약해지고 굽어지는 것입니다.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어지는 것은 음식물을 씹는 ‘치아’가 하나 둘씩 빠져서 치아 숫자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창으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지는 것은 세상의 빛을 보던 ‘시력’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1960년대, 제가 어렸을 때 TV앞에 모여서 레슬링 시합에서
건장한 김일선수가 등장해서 링 위에서 상대를 박치기로 쓰러뜨릴 때마다 온 한국사람들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 환호했지만
불과 35년의 세월이 흘러 1995년 도쿄돔의 은퇴식 장면에서
6만 관중이 모인 그 큰 경기장에, 한때 자신의 두 다리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 세계를 호령하던 그 사람이,
이제는 휠체어를 탄채 입장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평생을 바쳤던 그 링의 기둥을 손으로 몇 번 두드리고는, 조용히 링을 떠났습니다.
박치기 기술로 세상을 흔들었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 다리로 서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김일 선수의 말년은
운동 후유증에다 고혈압, 노환까지 겹쳐 입.퇴원을 반복하며 병원신세를 지고 있었으며…
아내를 잃고, 동생을 잃고, 아들마저 먼저 떠나보내는 말년을 보내었습니다.
이렇게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지는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4절:”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히는 것은 외부와의 소통(입이나 귀의 기능)이 줄어들고 활동 범위가 좁아집니다.
맷돌 소리가 적어지는 것은 소화 기능이 약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잠이 줄어들어서 신경이 예민해져 작은 새소리에도 일찍 깨어납니다.
음악하는 여자들이 쇠하는 것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목소리가 약해져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을 즐기는 감각이 무뎌지는 것을 뜻합니다.
5절: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높은 곳과 길을 두려워하는 것은 경사나 길거리를 걷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신체 균형 감각과 기력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살구나무 꽃이 피는 것은 살구 꽃의 흰색처럼 머리칼이 하얗게 백발로 변하는 것을 가리키고…
메뚜기도 짐이 되는 것은 가벼운 메뚜기조차 무게감을 느낄 만큼 아주 작은 일이나 짐도 감당하기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원욕(식욕·욕구)이 그친다….
삶의 모든 욕구와 의욕이 사라지고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여 영원한 처소로 돌아가고,
하객 대신 조문객들이 왕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6절 — “은 줄이 풀어지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도르래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은줄에 매달린 금 등잔,
우물에서 물을 긷는 두레박과 도르래—
이 모든 것이 갑자기 끊어지고 깨지는….
생명이 끊어지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뜻합니다.
7절 —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이 구절은 창세기 2장 7절—”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렇게 죽음은 창조의 역순으로 돌아갑니다.
흙에서 왔던 몸은 흙으로,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영은 다시 그 근원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1절에서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이렇게 2-7절에서 보았듯이 우리의 육신은 하나 둘씩 무너지며 후 곤고한 날을 맞이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의 집이 아직 멀쩡할 때
“하나님인 나를 중심에 놓고 하나님인 나를 한 시도 잊지 말고 기억하며 나를 너희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살도록 하라”
그렇게 하나님과 기억한 삶만이 영원히 천국에서 기억될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기억하라”는 말은 “자카르”입니다.
우리는 “기억한다”고 하면 보통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으로만
여기지만
히브리적 사고에서 “자카르”는 철저히 관계적이고 행동 지향적인 개념입니다.
출애굽기 2장 24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다”에서
**’기억하다’**는 말도
단순히 머릿속으로 떠올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약속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로 결단하시며…
모세를 부르시며 출애굽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억’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기억입니다.
전도서 12장 1절에서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도
단순히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행동하며 살아가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창조주를 기억하는 삶은 영생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이렇게 정의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여기서 아는 것도 단순히 머리속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하나님을 아는 것, 곧 하나님과 인격적인 체험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죽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날부터 영원토록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고,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체험적으로 지속적으로 가지며 영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반석위에 집을 세운 사람들처럼 말씀을 듣고 행하며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명확하게 체험을 하게 됩니다.
말씀이 하나님이시기에 말씀대로 행하므로 하나님을 생생하게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들은 비가 오고 폭풍우가 불어도 끄떡하지 않고 이겨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모래위에 집을 세운 사람들은
머리 속으로만 하나님을 알기에
비가 오고 폭풍우가 불 때 다 무너집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행한…
반석위에 집을 세운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을 맞이 할 때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마지막 순간을 맞이 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올 때와 비슷합니다.
예전에 김포공항에서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올 때 식구들 친척들이 다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배웅을 합니다.
그러면서 얼마 안 있으면 저들도 뒤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올 것이라고 생각을 하며 아쉬움을 조금은 달래봅니다.
마찬가지로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식구들… 아들, 딸들이 와서 눈물을 흘리며 배웅을 합니다.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날 아침 거기서…
순례자여 예비하라 늦어지지 않도록
는 찬송가를 부르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어 봅니다.
제가 36년 전에 신학교 때 만난 목사님이 이렇게 천국에 가셨습니다.
한국에서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서부에 있는 버지니아에 있는 공대에서 원자력 공학박사학위를 취득하다가
바이블 스터디를 하다가 소명을 받고
바로 탈봇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 제가 만났습니다.
이분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나서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
저도 한 동안 같이 사역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2년 전에 병세가 악화가 되어서
그동안 호흡기와 여러 튜브에 달려서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이렇게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해서
이제 그분의 의지로 모든 것을 다 떼어내기로 했습니다.
그분의 의식은 너무나도 또렷해 있었습니다.
떼어내기전 아는 교인들.. 신학교동창….
다 와서 환송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떼내기전 한국에 있는 동생한테 전화를 하는 겁니다.
한국에서 청명하게 들려오는 동생의 음성을 이분이 듣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이 분이 말을 하면 입모양으로 대강 옆에 있는 사람이 그것을 전해주고 또 동생이 얘기를 하다가 전화를 끊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순간에
거기에 모인 저를 포함한 사람들과 다 일일이 인사를 하고나서…
제가 기도하고 나서….
이제 모든 의료장비 튜브를 다 떼어내는 겁니다.
떼어내기 전에 이제 마취주사를 놓는데
그 때 이분의 입모양이 “많이 많이”
이제 천국을 곧 가는데 마취 주사를 많이 넣어서 아픔을 느끼지 않고 평안히 천국에 올라가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 순간에 조금 웃겼습니다.
그렇게 튜브를 떼어내고 나서 바로 운명하시며 천국에 올라가는..
그런 마지막 임종을 처음 보았습니다.
마치 예전에 김포공항에서 식구들을 다 뒤로 하고 비행기 탑승 대기실로 옮기는 것 같은 장면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억하며 영생의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육신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천국으로 이민가는 것입니다.
더 좋은 나라로 이민 가듯,
썩어질 세상을 떠나… 썩지 않을 하나님 나라로 이민가는 것입니다.
잠시 머물던 나그네의 삶을 마치고,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민 가듯이 가기 위해서
우리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일하든지 쉬든지, 사람을 대하든지…
모든 삶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생각할 때에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생각하고,
말할 때에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말하고,
행동할 때에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는 삶은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기억이 됩니다.
영생의 삶이기 때문에….
세상의 성공과 성취는 이 땅에 우리의 육신이 흙으로 돌아갈 때
안개처럼 사라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행한 모든 것은 영원히 하늘나라에 기억됩니다.
우리 인간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집니다.
젊었을 때의 일도 잊어버리고,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도 희미해지며,
결국 죽음과 함께 이 땅의 모든 기억은 끝이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하나님 안에서 한 우리의 삶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6장 10절에서
“하나님이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며 드린 예배,
조용히 흘린 눈물의 기도,
이름 없이 베푼 사랑과 섬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희생…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사람은잊어도….. 세월은 흘러도…..
우리의 몸은 늙어도….. 죽음이 찾아와도…..
하나님은 영원히 잊지 않으십니다.
야곱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고된 삶을 살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을 속이며, 자기 자신도 주위 사람들에게 속기도 한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신앙이 하나님에게로 더 가까이 나아가면서
그의 삶은 점차 하나님안에서 더욱 더 평안한 삶을 살게 된 것은
야곱이 하나님만을 꼭 붙잡고 기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마지막을 참으로 아름답게 맞이했습니다.
창세기 49장 33
“야곱이 아들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지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그는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지 않고…
자녀들을 불러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사람 한 사람 축복하며
아름답게 예배드렸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1절은 그 장면에서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예배하였으며.”
그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아들들을 향한 축복과 예언이 나왔고,
이것이 바로 창조주를 기억하며 살아온 사람의 마지막 모습입니다.평생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온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품으로 평안히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은 이 땅에서부터 더욱 더 깊은 천국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보호아래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풍성하게 누리며 감사하고 평안해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에 기꺼이 하나님의 품으로 안길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며 육신의 죽음의 문턱을 가뿐히 넘으며
저 천국으로 기쁘게 올라가는 겁니다.
피터김 목사님 마지막 돌아가실 때
웃음이 깃든 얼굴로 평안하게 가신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렇게 죽음 앞에 서야…
우리는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의 눈이 뜨이게 됩니다.
깨어진 관계가 하나가 되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게 되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영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려 할 것이고 하나님 말씀이면 어떻게 해서라도 순종하며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하게 되는 겁니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전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만나며 체험하는 영생의 삶을 살며
곤고한 날에도 기쁘게 감사하며 예배드리다가
천국에 다 올라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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